뉴욕 모마가 품은 AI 미술, 레픽 아나돌의 세계

- 레픽 아나돌 아시아 첫 개인전 《지구의 메아리 : 살아있는 기록 보관소》

시작은 퀴즈로 : 다음중 AI 미술 작품은?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이세라의 미술 퀴즈.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하는 게 좋아요. 우리는 글로 만나지만 묻는 순간 마치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므로.) 이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다음 작품들 중 AI를 활용하지 않은 것은? 보기는 총 5개입니다.

고르셨나요? 정답은 5번, 17세기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Portrait of Pablo de Valladolid> 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먼저 1번은 프랑스의 아티스트 그룹 오비어스(Obvious)가 제작한 <Portrait of Edmond de Belamy> 입니다. 이 작품은 지난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상 낙찰액을 훨씬 웃도는 43만 2천 달러에 판매 되면서 ‘인공지능과 미술’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2번은 MIT와 IBM이 공동으로 설립한 인공지능 연구소, ‘MIT-IBM Watson AI Lab’ 소속 아티스트인 마우로 마르티노(Mauro Martino), 3번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보리스 엘닥센(Boris Eldagsen), 4번은 한국의 노상호 작가가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달리(DALL-E)2를 비롯한 기타 툴을 활용해 만든 작품입니다. 너무 쉬웠나요?

사실 저는 ‘이것도 AI로 만들었다고?’ 하며 몇 번 놀랐는데요. 지난 2, 3년 동안 인공지능으로 만든 미술 작품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또 한 번 체감했기 때문이죠. 제가 처음 인공지능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22년입니다. 그해 열린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최종 우승작은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이었습니다. 해당 작품은 게임 기획자인 제이슨 앨런이 생성형 AI 미드저니에 텍스트를 입력해 만든 것으로 수상이 결정되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죠. 제이슨이 직접 그린 부분은 단 한 곳도 없으므로 수상을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과꼭 작가가 직접 그려야지만 작품인 것은 아니다, 순수 미술 분야라면 문제겠지만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수상한 것이니 괜찮다 등 여러 의견이 오갔죠.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이것이 미술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대신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술 작품 제작’이라는, 이미 시작된 흐름을 막을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먼저 해 보는 겁니다. (이건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 문학, 애니메이션 등 기타 다른 창작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한 질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막을 수 없다’라는 답을 하실 거예요. 이미 인공지능은 미술 창작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 자리잡았고 일부 작가는 그것을 적극 활용합니다. 여기에 인공지능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관람객들까지 더해진다면, 더이상 인공지능 미술이 미술 바깥에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제이슨 앨런,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사진 : 위키피디아)

현대미술의 일부가 된 AI 미술

AI 미술이 특수한 어떤 것이 아니라 회화나 조각, 퍼포먼스와 같이 미술을 구성하는 다양한 매체 또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작가는 누가 뭐래도 레픽 아나돌입니다. 튀르키예 출신인 레픽 아나돌은 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LA로 거주를 옮겨 본격적으로 미디어 아트를 공부합니다. 인공지능 미술에 대중은 물론이고 작가, 연구자들도 큰 관심을 갖지 않던때부터 인공지능 작품 제작을 시작한 그는 현재 명실상부 동시대를 대표하는 AI 기반 아티스트입니다. 특히 지난 2022년에는 현대미술의 성지와 같은 뉴욕 모마에서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는 AI 미술이 현대미술의 한 갈래로 공인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지표와 같았습니다. 당시 레픽 아나돌은 모마의 방대한 소장작을 AI에게 학습시킨 후 그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발전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생산하게끔 했습니다. 레픽 아나돌의 작품에서 AI가 스스로 창작 활동을 한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레픽 아나돌: 감독되지 않은(Refik Anadol:Unsupervised)’ 전시 (사진 : 작가 홈페이지)

2022년 모마 전시에서 관객들은 모마의 소장작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새로운 화면과 마주합니다. 초 단위로 바뀌는 이 화면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영상이 재생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AI가 미리 학습한 소장작 데이터에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수집하는 자료(당시 뉴욕 날씨, 주변 소음이나 관람객들의 움직임 등)가 반영되면서 도출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이 작품이 상영되는 미술관 2층 로비의 특정 공간을 지나거나 몸을 움직일 때 AI가 그 데이터를 수집해 시각적 반응을 생성하는 거죠. 즉 관객이 어떻게 전시를 경험하는지에 따라 작품의 이미지나 패턴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당시 모마 전시명은 《감독되지 않은(Unsupervised)》. 인간(작가)의 관리 감독, 계획과 통제를 벗어난 AI 미술에 붙여질 법한 제목이었습니다.

2022년 모마 전시를 기점으로 레픽 아나돌은 세계적인 AI 작가로 급부상합니다. 세계 곳곳의 유수 미술관과 협업하며 AI 미술의 현주소를 알려왔던 그는 한국과도 나름 연이 깊은데요. 2020년 DDP 전시로 이름을 알린 데 이어 작년 여의도 63빌딩 1층 로비에 상설 전시작 설치, 올해는 북촌에 새롭게 개관한 전시 공간 ‘푸투라 서울’에서 아시아 최초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레픽 아나돌 아시아 최초 개인전

《지구의 메아리 : 살아있는 기록 보관소》

푸투라 서울의 개관전이기도 한 《지구의 메아리 : 살아 있는 기록 보관소》의 주제를 한 단어로 정리해 보자면 ‘자연’입니다. 전시작들은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지난 십여 년간 수집해온 대량의 자연계 데이터(아마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세계 16곳의 우림에서 수집한 소리와 풍광 사진, 3D 스캔 데이터를 비롯해 스미소니언 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 등)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자연 모델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자신이 해석한 자연을 시각화하는데, 실제 자연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 앞에서 우리는 경이로움과 이질감, 호기심 등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대지의 메아리》 전의 ‘기계 환각’ 시리즈 4점. 적게는 수백만에서 많게는 4억 개에 달하는 동식물, 자연 풍광, 산호 이미지 등을 수집 학습한 인공지능이 이를 디지털 안료로 변환해낸다. (사진 : 푸투라 서울 홈페이지)

전시장은 총 4개의 섹션, 8점의 작품으로 구성됩니다. 전시장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첫 섹션인 갤러리 1에서는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자연 특화 오픈소스 생성형 AI 모델 <대규모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l, 이하 LNM)>의 개발 과정과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픽 아나돌과 그의 팀원이 어떻게 세계 우림 지역을 탐험하며 자료를 수집했는지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작업 이해에 도움을 주고 이어지는 갤러리 2에서는 세계 우림을 생생하게 재현한 AI 시뮬레이션을 선보입니다. 긴 터널 같은 구조를 띠는 이 작품은 우림의 야생 동식물과 자연 경관을 표현함과 동시에 레픽 아나돌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에 둘러싸인 상태’ 그 자체를 시각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구의 메아리>> 갤러리 2 전경. 관객은 양옆으로 끝없이 재생되는 데이터를 보며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현시대의 축소판을 감각할 수 있다. (사진 : 이세라)

갤러리 3에서 볼 수 있는 <서울바람> 과 <인공현실: 태평양> 은 레픽 아나돌이 푸투라 서울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신작으로 전자는 서울 전역에 배치된 실시간 날씨 센서를 통해 수집한 풍속과 온도 데이터 등을 디지털로 시각화했고 <인공현실> 은 지난 5년 동안 태평양에서 수집한 풍속 예보 데이터를 AI 데이터 페인팅으로 변환했습니다.

마지막 공간이자 규모 면에서 전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갤러리 4에서는 앞서 언급한 <기계 환각> 시리즈 4점을 볼 수 있는데, 실제 동식물이나 자연 풍광을 AI가 어떻게 시각화하고 있는지를 다중 화면을 통해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중 ‘산호 시리즈’는 지난달 뉴욕 유엔 본부의 지도자 총회 기간 동안 뉴욕에서 동시 전시를 하기도 했는데요. 인공지능만큼이나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인 환경, 자연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픽 아나돌의 작품은 ‘시대의 자화상’이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작업입니다.)

《지구의 메아리》 갤러리 4 전경 (사진 : 이세라)

레픽 아나돌은 이번 전시에 대해 “(이 전시는)인공지능이 우리의 행성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가교가 되는 모습을 담은, 자연과 기술의 융합에 대한 헌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이번 전시작들은 전작과 다르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부각함으로써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전작의 결을 잇는 부분도 존재하는데, AI 미술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인공지능 미술은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디지털 미감을 경험케 하며 AI 미술이 어디까지 인간을 매혹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전시장에 막 들어가 관객이 처음 마주하게 되는 벽글은 “기계가 자연을 꿈꿀 때 어떤 모습일까?”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기계는 꿈꿀 수 있는가?”라는 물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AI 미술을 넘어 AI 자체에 갖는,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기계가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계가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가진 기계를 활용해, 기계와 인간의 감수성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레픽 아나돌의 작업은 감성과 이성, 따뜻함과 차가움을 오가거나 양쪽 모두를 포괄하며 전에 없던 새로운 감각을 선사하곤 합니다.

글. 이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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