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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9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롯데전.

3-0으로 앞선 한화의 8회초 수비에서 한 젊은 여성 한화 팬이 중계카메라에 포착됐다.

1사 2루에 롯데 유강남 타석. 투수 이민우가 투스트라이크를 잡자 양손을 모으고 애타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이 여성은 자신만의 '의식'을 시작했다. 양 주먹을 꼭 말아쥔 뒤 잠시 박수를 친 다음 흔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1구 1구를 지켜봤다.

3구째 높은 공이 볼이 되자 양 손을 머리에 얹으며 격렬하게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분은 리액션 1등이시네요"란 중계 아나운서의 코멘트를 이끌어낸 액션. 3구째 낮은 유인구 커브에 유강남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이 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주체할 수 없는 격렬함 속에 라이트 잽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격한 환호였다.

지난 수년 간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를 많이 지켜봐야 했던 한화 팬들. 이 여성팬의 간절함에 격하게 공감했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가슴 졸이며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은 한화팬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느낌이다. 이 영상이 주목 받으면서 단숨에 한화 팬들 사이에 '비나이나' 여성 팬으로 유명세를 탔다.

홀로 나타나 간절하고 격한 응원을 펼치다 조용히 사라지는 이 여성 팬.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수소문에 나섰다.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만들어 낸 강행군

지난 7월23일 삼성과의 홈경기를 앞둔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만났다.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던 바로 그 분. 밝고 쾌활한 인사가 돌아온다.

'신상에 대해 밝힐 수 있는 만큼만 밝혀달라'고 하자 큰 고민 없이

"서울 청담동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는 30대 권유휘"라는 답이 돌아온다.

거주지가 대전 아닌 서울이라고? 그런데 야구 보러 수도권은 물론, 대전이나 광주 대구 등 다른 도시를 당일치기로 오간단다. 심지어 "숙박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고객님 예약이 있어서요. 야구볼 수 있는 저녁 스케줄을 최대한 조정해서 야구장을 오가고 있죠." 수시로 대전과 지방을 오가다보니 교통비가 만만치 않다.

"SRT VIP 됐더라고요. 저한테는 티켓 비용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교통비가 훨씬 더 많이 드니까. 제가 대전만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방, 부산 대구 광주 창원까지 가니까요. 야구장 티켓보다 오가는 교통비가 더 들 때가 많아요."

열정적 염원으로 유명해 지면서 자연스레 야구장에 갈 때마다 중계에 잡힌다. 홈 경기 매진이 가장 많은, 그래서 티켓 구하기 가장 어렵다는 대전 경기를 오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다니. 비결이 있을까. 간혹 불필요한 오해도 있다.

"DM으로 '티켓을 누가 구해준 거 아니냐'고 오해하고 안 좋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요. 티켓은 어떻게든 노력을 하면 구할 수 있어요. 멤버십 시즌 전에 가입하고, 대전은 선 예매권도 있고요. 예매 못한 날은 당일 취소표로 오는 경우도 많아요. 저는 혼자 다니니까 1인 표는 구하기가 좀 쉽더라고요. 저만큼 야구 보러 다니면서 돈 많이 쓰는 분들 많지 않을거에요.(웃음)"

체력적, 비용적 부담에도 '직관'을 고수하는 이유? 명확하다.

"느낌이 좀 덜 생생하다고 해야 하나?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것이 확실히 생동감이 다르니까, 그리고 이기면 기분이 더 좋잖아요. 물론 여기서 보고 있을 때 지면 더 슬프지만요. 그래서 자꾸 오게 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은 처음에 딸의 야구장 나들이를 반겼다.

"제가 완전히 집순이거든요. 일 외에 유일한 외출이 야구장 가는 거였어요. 그러다보니 '너도 밖에 나가는구나'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야구장을 너무 자주 가고, 돈도 많이 쓰고 다니니까 요즘은 '너가 그럴 때냐'라고 걱정하시기도 해요."

부모님의 걱정은 딸의 과몰입. 야구장 다니느라 벌써 10년째 연애도 끊었다. 남자친구와 야구장을 같이 다니는 낭만은 사치일까.

"남친과 야구장을 함께요? 흠....저는 솔직히 온전히 야구에 집중하는데 방해될 거 같아요. 남친이든 누구든 같이 오면 이야기를 하고 뭐 먹고 이래야 되는데 저는 그게 귀찮아요. 야구를 온전히 봐야 하는데 옆에서 방해하니까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저는 혼자 와서 야구만 보는 게 좋아요."

권유휘씨가 좋아하는 건 딱 하나. 한화 야구뿐이다. '한화 없이 못 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팬이다. 한화 야구에 대한 사랑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녀가 한화이글스를 응원하는 이유

이 시점에서 궁금한 점 하나. 대전 출신도 아닌 권유휘씨는 대체 왜 한화 이글스 팬이 됐을까.

'왜 한화야구가 좋아지셨습니까?' "아, 그러게요.(웃음)"

"저는 대구 출신 서울 사람이거든요. 저희 오빠가 올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왜 한화를 응원하느냐. 차라리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삼성을 응원했으면 올해는 행복했을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그게 인력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거라…."

남친 없이는 살아도, 한화 이글스 없이는 못 살게 된 권유휘씨. 한화와의 인연은 얼마되지 않았다.

"딱히 야구에 취미가 없었어요. 룰은 다 알고, 국가대표 경기하면 보는 정도였죠. 그러다 2년 전쯤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다가 이글스tv를 보게 되면서 빠져 들었던 것 같아요. 이글스tv가 잘하잖아요. 제가 약간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파는 스타일이거든요. 야구를 보러 다니면서 내일이 기다려지는 오늘이 오랜만이라고 느꼈어요. 오늘 지면 내일은 이기겠지 기다리고, 오늘 이기면 내일 또 이기겠지 하고 하루하루를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난 날'이라는 LA다저스 토니 라소다 전 감독의 말은 권유휘씨에게 무척 공감 가는 말이다.

"정말이에요. 시즌 끝나면 진짜 심심하더라고요."

한화라서 행복하다지만 야구에 몰입하는 현실 '찐팬' 권씨가 늘 행복한 건 물론 아니다.

이날 인터뷰 직전까지 한화는 7연패 중이었다.

가뜩이나 직전 경기였던 21일 대전 KIA전에서 9회초 최형우에게 역전 스리런 홈런을 맞고 7대8로 뼈 아픈 패배를 했다.

"그거 보다가 너무 현타가 와서 저 그날 진짜 이기는 줄 알았어요. 하필 또 잘하던 주현상 선수여서 말도 못 하고, 그래 (블론을) 할 때 됐긴 했는데 하필 오늘이었어야 했을까, 왜냐하면 저희가 앞으로 남은 경기들이 삼성 LG KT 등 힘든 대진이라서요."

한화 스케줄을 줄줄 꿰고 있는 찐팬. 권씨의 강력한 염원 덕분이었을까. 이날 대전 삼성전 6대5 8회 역전승을 시작으로 한화는 7연패에서 벗어났다.

한화 야구를 훤히 꿰고 있다. 과몰입의 배경이다. 당시 슬럼프에 빠져있던 페라자의 부진 이유를 슬쩍 물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아프기 전에도 조금식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프고 나서 못하니까 심리적인 조바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공을 잘 봤는데 시즌 초에 비해 요즘은 공을 못 보는 걸 보면요. 얼마 전에 페라자 엄마가 처음 야구장에 왔었다고 하는데 보여주려는 욕심도 있었을 것 같고요."

특정 선수들을 좋아하는 MZ 여성팬들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 야구장을 많이 오지만 선수들에게 줄을 서서 사인을 받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한걸음 떨어져 한화 야구 자체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진정한 팬.

"저는 열심히 하는 선수, 스토리가 있는 선수를 더 좋아하고 응원하는 편이에요. 열심히 하는 선수가 좀 못 하면 짠하고 더 아쉬운 게 있어요. 특히 신인 선수들은 조금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황영묵 선수나 주현상 선수를 많이 응원하는 편이에요. 하려는 의욕이 강하고, 피해가지 않는 선수라서요."

몰입해서 야구를 보다보니 자연스레 화제의 '비나이다' 포즈가 나왔다. 과연 무엇을 비는걸까.

비나이다! 한화이글스의 승리를!

"투수는 '일단 한 타자만 막아봐' 약간 이렇게 빌고, 타자는 클러치 상황 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2,3점 차에서 그렇게 돼요. 한 7,8점 정도 벌어지면 여유를 가지죠. 그런데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는 7,8점 차도 불안하더라고요. 제가 대전에서 두산한테 6점 차로 이기고 있을 때 역전당한 경기를 봤거든요. 그날 충격을 먹어서 우리가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4점도 불안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이렇게 빌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어요."

방송에서 화제가 된 사실. DM으로 알게됐다.

"저는 경기장에서 중계를 켜놓고 보지 않아요. 먹지도 않고요. 물 만 마시면서 오직 야구경기에 집중하죠.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더 액션이 크게 나오는 것 같아요. 유난히 과몰입을 하게 되고, 그래서 욕하는 것도 많이 잡히지 않나 싶어요. 좀 자중 하려고 했는데 너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웬만하면 해소하고 가는 편이거든요. 선수들이 못 하면 여기서 소리 다 지르고 가죠. 당연히 미워서 그런 건 아니죠. 싫었으면 애초에 안 왔을텐데 좋아하는 만큼 반응하게 된다고 할까요."

중계 카메라가 놓치지 않는 팬이 된 상황. 'TV에 잡히려고 오버액션 한다'는 시선은 억울하다.

"제가 TV에 대고 욕을 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신이 나면 일단 노는건데, 제게는 여기 야구장이 클럽이고, 워터파크고 이런 느낌인 거라 내 멋대로 놀고 싶고, 그런데 중계에 언제 잡히는 지 저는 모르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뭐 잡히면 잡히고 말면 말자는 마음인데 DM이 쏟아져서 알게 돼요. 갑자기 핸드폰이 불이 나서 보면 '아, 나왔구나' 약간 그렇게 되죠."

점점 유명해지다 보니 샵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생기고, 포항에 사는 삼성팬 아버지가 한화 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잠실 경기였는데 아빠가 TV 틀자마자 제가 딱 나온 거예요. 오빠한테 카톡이 왔더라고요. 너 딱 걸렸다고. 다행히 점수 내서 환호하던 장면이라서 욕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오빠가 제가 욕하는 장면도 편집해서 아빠한테 보여드린 것 같더라고요. 막 뭐라고 했죠.(웃음)"

나~는 행복합니다~

오랜 인터뷰. 마칠 시간이 됐다. '한화 찐팬' 권유휘씨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화 팬이어서 행복하십니까?'

"(살짝 머뭇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시즌 초 연승 때는 정말 행복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불행할 수가 있나' 저는 좀 과몰입 하니까, 그날 경기에 따라서 약간 며칠 동안의 컨디션이 달라져요. 대구 삼성전에 8회에 역전해서 옆에 응원하시는 분 잡고 하이파이브 하고 '너무 신나요' 난리 쳤는데, 8,9회에 홈런 맞고 졌거든요. 그날 야구장에서 울었어요. 너무 속상해서요. 옆에 분이 휴지 주시더라고요. 현타가 세게 온 날은 바로 집에 못 가요. 앉아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안전요원 분들이 '이제 퇴장하실게요' 하더라고요. 고척에서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올해 인생경기도 있었다.

"김승연 회장님 오셨을 때 끝내기 경기(3월29일 대전 KT전 3대2 승)요. 이길 거라 생각도 못했고, 임종찬 선수한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는데, 이기는 순간, 정말 기억이 없었어요."

시즌 중 월요일을 빼고 매일 열리는 한화 경기에 울고 웃는 권유휘씨. 너무 한화를 좋아해 표정관리, 욕 관리가 안되는 찐팬.

아무리 한화팬이라도 이겨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지더라도 치열하게 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런 소중한 팬을 대하는 선수단의 자세다. 권유휘씨는 오늘도 변함없이 한화 야구를 보러 간다.

레전드 찐팬 근황 – 권유휘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