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기반의 작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Mie Olise Kjærgaard, b. 1974)의 그림 속 여성들은 펜스를 거침없이 넘나들고, 네트 넘어 힘차게 테니스 공을 던져보내며, 정체 모를 짐승 위에 올라타 질주한다. 개개인의 표정과 이목구비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의 국적, 인종, 문화권 등으로 특정되지 않는 키에르고르의 여성들. 지난 3월 말, 작가의 첫 아시아 개인전 《Gamechanger》의 오프닝을 맞아 한국을 찾은 작가를 이태원 파운드리 서울에서 만났다.

크락티 :

인구가 약 2만 명밖에 되지 않는 덴마크의 작은 섬 모르스(Mors)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러한 성장 배경이 오늘날의 작업에 미친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작가 프로필 이미지 © Mie Olise Kjærgaard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나의 성장 배경은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나는 그림을 통해, 삶의 방식을 통해 성 역할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체계들을 질문하고 있지만,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모르스 섬은 그런 성 역할 따윈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너무 작은 커뮤니티여서 어떤 집단적인 구분보다는 개개인의 성격이 더욱 도드라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와 같은 사회적 편견 없이 모두가 온전히 각자의 개성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섬이라는 배경이 주었던 에너지와 자유로움, 내가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었던 기억이 지금의 내 작업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크락티 :

학부 시절 건축을 전공했다. 이러한 교육 배경이 당신의 그림에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하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사람이 어떤 구조 위에 위태롭게 서있거나, 중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자주 그리는데, 이는 모두 내 건축학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건축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균형’이라는 요소에 관심이 많다. 특히 모든 것이 안정된 상태보다는 불안정한 구조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Off the Record Hurdling, 2023, Acrylic on canvas, 150x195cm

크락티 :

몇 년 전 인터뷰 영상에서 각 전시 공간의 건축적 구조를 고려해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파운드리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어떻게 반영했는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아래층에서부터 위층까지 이어지는 높은 벽을 잘 활용해 보고자 했다. 3개의 캔버스를 이어붙인 트립틱(triptych) 형식의 작업을 전에 제작해 본 적은 없으나, 여기 이렇게 크고 멋진 공간이 있는데 도전을 안 해볼 수 없지 않은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사실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구상하며 여러 고민을 했다. 한 벽면에 이렇게 크고 압도적인 작업을 전시했을 때 그 맞은편의 벽면이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 보이진 않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따라서 그 맞은편에 조명을 활용한 작업을 넣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법도 생각했다. 이외에도 작품을 걸고 벽의 남은 여백에 직접 페인팅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할까도 고민하는 등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나는 원래 규칙을 깨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중앙에 큰 페인팅을 걸고 양옆 벽면에 페인팅을 조금씩 높게 걸어 공간에 역동성을 주는, 보다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을 택했다. 작품 속 여성들의 액션이 이미 충분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전시 방식 자체는 더 미니멀하고 간단한 옵션을 택함으로써 작품과 공간 사이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Beachy Volley, 2023, Acrylic on canvas, 250x220cm

크락티 :

“규칙을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보니, 작품에 묘사된 용감하고 거침없는 여성 인물들이 어쩌면 작가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전 인터뷰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큰 머뭇거림 없이 일단 “뛰어드는 걸(dive into)”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보았다. 작업 방식에 나타나는 이러한 용기와 대범함이 캔버스를 넘어서 삶에 대한 접근 방식과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내 작업실은 내가 정한 법과 규칙으로 운영되는 나만의 왕국이고, 또 내가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는 곳이다. 작업실에서 ‘만약’이라는 상상을 정말 많이 한다. ‘만약 이 인물이 여기서 이렇게 했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나의 한계와 시야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려 한다.

물론 가끔 작업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림 하나를 망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니 항상 열린 마음으로 작업한다. 그래서 페인팅에 있어 소위 ‘슬럼프’나 위기 같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양한 실험을 해야 했었던 시기는 있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약 4년 정도였는데, 이 시기에 나는 작품을 거의 팔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그려나갔다. 그전엔 집과 배와 같은 도상을 주로 그렸었는데, 이 시기 동안 완전히 새로운 것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당시 함께 일하고 있던 갤러리가 의아해했을 정도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원하는 스타일을 찾자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비로소 준비가 된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속도를 붙여 열심히 작업을 해 내년 1월에는 덴마크 트랩홀트(Trapholt) 미술관에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크락티 :

지금 작품 수요가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업이 팔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니 놀랍다. 그럼 지금의 여성 인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던 건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지금 이 여성 인물들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쯤이었다. 2019년 여름부터 인물들과 얼굴을 그리고 있었고, 그해 겨울에 본격적으로 지금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여성 인물들을 그린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그전과는 다른 스타일을 찾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 계속해서 실험하며 스케치만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날도 허다했다. 대칭과 같은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요소, 그리고 10대, 20대 때 배운 습관을 잊어버리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야 했다.

Playing Ship, 2023, Acrylic on canvas, 220x195cm

크락티 :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여성 인물들은 생김새도, 배경도 익명성이 강해 그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 한 인종으로 특정되지 않아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는 듯하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그렇다. 내가 그리는 이 인물들은 어느 하나의 인종이나 국적으로 특정되지 않아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 여성들이 누군지에 대한 정말 다양한 해석을 들었다. 특정 인종에 국한되지 않는 이 인물들을 두고 누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나의 팀을 이루는 구성원들이라 보기도 한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이 한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모션 그래픽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기에 들어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과 그 안에서 생성되는 담론들이 꽤 마음에 든다.

이들은 모두 일관되게 활동적이고 강한 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겨드랑이 털, 볼록 나온 배, 위로 곧게 솟은 머리카락 등 재미있는 디테일을 더해 각 인물 사이 차별점을 두려 한다.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그리기 시작하기보단, 무언가를 대략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후 그림이 순간순간 요구하는 것을 내가 맞추어 나가는 식이다. 결과물에 제약을 두지 않고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예술가의 역할은 정답이 하나인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수학자나 과학자의 그것과 다르다. 예술가는 가끔 먼 길을 돌아서 가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돌아오거나, 중간에 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항상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사람이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크락티 :

당신의 작품은 무언가 새롭게 체득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방법을 익혀나가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보통 나이가 들며 이런 기억이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 기억을 꾸준히 유지하며 작업에 담아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많은 이들이 각자 어린 시절 새로운 운동이나 활동을 익혀나가며 느꼈던 짜릿함을 기억할 것이다. 핸들에 손을 대지 않고도 자전거를 타며 만끽하던 자유로움과 해방감, 그래서 이젠 정말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 그런데 누구나 어른이 되어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이 바라는 나의 모습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게 된다. 특히 여성의 경우 타인으로부터 받는 외모 평가는 물론, 종종 성적으로 대상화되곤 한다.

스스로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무언가를 몸으로 습득했을 때의 짜릿함을 계속해서 되새기고자 아직도 그림에 이를 그려낸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때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갈 때나, 라켓으로 테니스 공을 쳤는데 ‘정말 잘 맞았다!’싶은 경쾌한 소리가 날 때 등,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짜릿함을 느낀다. 작업에 이런 역동적인 인물들을 그리는 것은 이러한 기억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위한 시도다.

Balancing on the Net, 2023, Acrylic on canvas, 162x176cm

크락티 :

마지막으로, 전시의 제목 ‘게임 체인저’는 어떤 일의 판도를 바꿀 만한 중요한 사건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생의 ‘게임’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바꿔놓고자 하는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테니스, 허들, 비치발리볼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주제로 삼는다. 최근에 여성들이 언제부터 어떤 계기를 통해 바지를 입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역사를 찾아보다가, 승마와 자전거를 타기 위해 바지를 입기 시작한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성 보호자의 동반 없이 비로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당대의 여성들을 상상하며, 기존의 제도와 역할로부터 해방구를 열어주는 ‘스포츠’라는 장르가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게임 체인저’에서 말하는 이 게임은 굳이 스포츠 게임에 국한되진 않는다. 이 경기장은 스포츠 경기장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라는 더 큰 맥락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우리가 고집해오던 사고방식과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체계를 벗어나, 게임의 기존 규칙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는 스포츠 경기장이라는 좁은 배경을 설정해 적절한 유머와 재미의 요소를 함께 가져가며 이러한 불평등의 주제를 조금 가볍게 환기하고자 했다. 이것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어떤 생산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좋은 지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Gamechanger》 2024. 3. 2 — 5.11 파운드리 서울

《Gamechanger》는 파운드리 서울에서 오는 5월 11일까지 진행된다.

글. 박지민(크락티)

이미지 제공. 파운드리 서울

비하인드 더 아트 :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아티스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