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Mie Olise Kjærgaard, b. 1974)가 화가라는 꿈을 갖기 시작한 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기껏 2만 명 안팎의 인구를 지닌 덴마크의 외딴섬 모르스(Mors)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작가는 그림의 기본기를 일러줄 선생님 한 명 없이, 혼자 마음이 가는 대로 선을 그어나가며 아주 막연한 예술가의 꿈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 코펜하겐에서 장장 400km 떨어진 모르스 섬에는 미술관과 갤러리와 같은 문화공간이 전무했다. (작가는 16살이 되어서야 미술관에 처음 가봤다고 한다.) 대신 그에겐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구불구불한 언덕과, 고요한 바다를 품에 안고 펼쳐진 모르스의 풍광이 있었다.

“내가 자란 모르스 섬은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와 같은 사회적 편견 없이 모두가 온전히 각자의 개성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작가는 모르스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곳에서 나는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었고, 이러한 기억이 지금의 내 작업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가 15살 때 이미 거대한 캔버스를 직접 짜 야심만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때론 제도화된 교육보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자신감, 그 축복의 무지에서 오는 자유가 더 강력할 때가 있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키에르고르의 거침없는 여자들

현재 이태원 파운드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Mie Olise Kjærgaard)의 아시아 첫 개인전 《Gamechanger》는 생동감 넘치는 붓질과 역동적인 구도가 돋보이는 작가의 신작 18점을 소개한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키에르고르의 작업에는 경기장의 펜스를 거침없이 넘나들고, 모래사장에서 알 수 없는 철인삼종 경기를 펼치거나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한편 정체 모를 짐승 위에 올라타 질주하는 한 여성의 모습은 문화권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고대 벽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Going Left (Female Rage), 2023, Acrylic on canvas, 220x195cm

중요한 점은 이 인물들이 모두 하나의 국적, 인종, 문화권 등으로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개개인의 표정과 이목구비는 조금씩 다르지만 마치 한 팀인 듯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같은 색과 스타일의 머리를 곧게 휘날리며 화면 곳곳을 점유한다.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한 채 네트 넘어 공을 주고받고, 역기를 들어 올리고, 구조물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는 등 적극적으로 신체 활동을 함께 하는 이 여성들은 키에르고르가 상상하는 연대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낸다.

한편 그는 이와 같은 유토피아가 운이 좋은 누군가에겐 현실일지언정, 어떤 이들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작가는 자신과 닮아있는 이 용감한 여성들을 바라보며, “내가 여성이 자유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라고 느낀다. 이 세상엔 아직도 여성들이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곳들이 많으니까.”라고 이야기한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틀과 역할에서 벗어나, 대범하게 팔다리를 쭉 뻗어 보이는 키에르고르의 여성들은 결국 누구나 될 수 있고, 또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작가의 소망을 역설한다.

Mother and Child - New Territories, 2023, Acrylic on canvas, 150x170cm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여성들

키에르고르의 화면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만 같은 극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어떤 인물은 테니스 네트 위에 한 손을 올린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는가 하면, 서로 닮아 있는 다섯 명의 여성은 뗏목 위에 한 명씩 올라서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다.

학부 시절 덴마크 오르후스 건축대학교(Aarhus School of Architecture)에서 공부한 작가는 건축학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균형’이라는 요소에 일관되게 관심 가져왔다. 특히 모든 것이 안정된 상태보다는 불안정한 구조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렇게 작가는 각 인물을 균형을 잃기 직전까지의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몰아붙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이 위태로운 상황을 주도적으로 장악하고 온전히 즐기는 듯하다.

Tennis Trouble Makers, 2023, Acrylic on canvas, 225x585cm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미술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가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키에르고르는 지난 2년간 작품 구매 문의 증가율이 가장 높았던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물론 모든 구매 문의가 작품의 판매로 이어지지는 않기에 이것이 작품의 수요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섣불리 결론 내릴 순 없겠지만, 수요가 몰리기 전 항상 발 빠르게 움직이는 컬렉터들의 소비 습관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한 작가의 작품 문의율이 2년 사이 292%나 상승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작가가 최근 몇 년간 도상과 스타일에 있어 많은 실험을 거쳤고, 2019-2020년을 기점으로 지금의 대범한 여성 인물을 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전시의 제목 ‘게임 체인저’는 기존의 판도를 뒤집어엎는 중요한 사건을 의미한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인생의 ‘게임’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바꿔놓고 싶은 걸까? 지난 3월 말 전시의 오프닝을 맞아 서울을 찾은 작가를 직접 만나 함께 나눈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만날 수 있다.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개인전 《Gamechanger》 전경 사진: 노경

글. 박지민(크락티)

이미지 제공. 파운드리 서울

아티스트 인사이트 18 | 키에르고르의 거침없는 여자들